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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n CANADA

캐나다 이민, 어떻게 오게 되었어요? - 2부

안녕하세요.

두번째 포스팅 입니다.

 

이렇게 글을 자주 쓰게 될줄을 몰랐네요. 쓰다보니 재미있네 이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사일이 좀 바빴는데 요즘은 여름 휴가철이 다가오면서 그들 말로 pretty much slow 라고 하듯 꽤 조용하고 여유있는 분위기입니다. 제 회사생활 이야기는 다른 category에서 곧 다루겠습니다. 정말 꿀잼이 될 포스팅 일거에요.

 

~ 다시 첫 포스팅의 주제였던 어떻게 오게 되었어요 를 이어 적어 보겠습니다.

 

와이프가 1년 계획을 갖고 캐나다로 갔던 그 시기 저는 앞으로 어디서 지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죠. 제가 선택할 수 있던 option 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1. 조금마한 원룸에서 자취 (가장 원했던....)

2. 돈을 좀 절약하기 위해 혼자 독거하고 있던 사촌형님 집에 하숙.(이 또한 괜춘)

3. 처가집 (제가 얼굴이 상당히 두껍고 사교적인 편이나 처가집 문턱을 넘는다는 것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리 친숙한 일은 아니지요.)

 

option 1, 2 번을 가장 선호했고 가능성이 높았으나 그당시 저의 사정을 잘 알고 계셨던 장모님이 말씀 하시길.. 가족은 떨어져지내는거 아냐

우리집으로 들어오게.  100번 맞는 말씀이나 서로 불편해질 수 있는 상황이라 몇차례 사양을 했지만.... 일단 들어가 지내보는 것으로 결론이 나 처가살이를 시작합니다.

 

여기서 처가살이란 명사로 아내의 본가에 들어가 삶 이라는 뜻이죠.

관련된 속담으로는 "처가살이 십 년이면 아이들도 외탁한다" ,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하랴" 등 전통적으로 상당히 비관된 시선으로 처가살이를 바라보는 우리네 모습입니다.

저는 와이프와 결혼하기전 5년 가까이 연애하면서 장모님과는 왕래가 거의 없었기에 결혼 전 후 가끔 장모님댁에 가는 일이 있으면 조금 서먹서먹 했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가 안났죠 제가 좀 그래요 ㅋ

제 고향과 처가가 모두 같은곳이라 서울 신혼집에 살면서 간혹 고향친구들과 술 한잔 할일 있으면 늦게까지 놀고 택시타고 올라오기도 했죠. 굳이 처가는 안갔어요. 그거 하루 신세지는게 어떻다냐만 혈혈단신 와이프없이 그 늦은시간에 처가집에 염치없이 들어가 씻고 잔다는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어찌저찌 저는 와이프가 돌아오기 전까지 무려 1년 간은 장모님댁에서 지냈습니다. 그곳에는 와이프와 띠동갑인 살짝 까칠한 중3 처남이 있었습니다.

저와도 나이 차이가 워낙 많이 나고 덩치도 제가 크니 내가 호랑이고 넌 토끼겠구나 생각했는데 이 토끼 녀석이 점점 덩치도 커지고 머리도 커지면서 사춘기 (언제부터 언제까지였는지 모르겠음 가끔 지금도 인듯) 특유의 주변을 얼려버리려는 기세가 생겼습니다. 저는 아기는 좋아하는데 사춘기 아이들은 정말 어떻게 어울려야할지 모르겠더군요. 예전에 청소년 센터에서 봉사활동할 때도 그런부분이 힘들었는데 이 아이와 같은 집에서 살려니 살짝 막막했지만, 제게는 자본주의에 달달함을 누릴수 있는 자금력이 있었죠.

 

치킨이다그래 치킨이야 말로 날 세울것이다. Chicken raises me up !!!

가끔 서먹서먹 해질것 같으면 치킨을 시켜 같이 먹었습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처남이 더 달갑게 제게 굴을것 이라고 기대도 안했지만 그러한 제 노력이 있었다는 거죠...;; 

이제는 정말 추억이 되어 버린 그 1년이 었는데 가끔 가족들과 그때를 추억하며 얘기하면 그 시간이 정말 저희에게 소중하고 의미있었던 시간이라 생각해요. 일단 저는 말이죠. ㅎ 아마 장모님, 처남 모두 동의 하리라 봅니다.

 

그후 저는 장모님집을 제 집처럼 넘나드는 깡다구가 생겨 주기적으로 있었던 고향 친구들 모임 후에도 밤늦게 신세를 간혹 졌고, 휴일에 와이프와 함께 예전보다 더 편하게 자주 갈수있었습니다. 그당시 처남도 장모님도 모두 불편을 참고 저를 위해 인내해주신 점을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다시 캐나다로 정말 말 그대로 혈혈단신 떠난 와이프 이야기로 가보자면, 그녀는 밴쿠버 현지 커뮤니티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실습을 완료해 ECE 자격을 땄죠. 지금 그 자격을 전혀 사용 안하지만 저희의 또 하나의 삶의 자원이 된것이죠.

그녀가 밴쿠버에서 외로히 공부하던 중에 전문인력 이민이라는 category 가 잠시 열려?(한정적으로 몇명 받는다 라는 것?) 와이프가 지원을 해보자고 했어요저는 별 기대 안했고 그게 무엇인지도 잘 몰랐죠. 저의 관심사는 해외로 유학을 가 조금 더 깊게 공부해보는 것이었죠. 근데 와이프는 아무래도 현지에서 듣고 보는게 있으니 저보다 좀더 이민법의 흐름을 몸소 느꼈을것 입니다. 영주권을 받게되면 학비가 많이 saving 되고 안정적으로 그곳에 거주할 수 있는 신분이 생기는 것이니 제가 처음에는 쉽게 선택 못했으나 나중에는 안할 이유가 없더군요. 돈이 좀 들지만 여기와서 이민하면서 쓴 비용 얘기 들어보면 저희는 거의 푼돈 쓴거나 마찬가지 더라고요. 그리하여 저희는 각자 멀리 떨어져 영주권 신청을 준비하게 됩니다. 와이프가 이주공사와 communication을 하며 필요한 서류를 제게 말해주면 저는 각종 서류를 한국에서 유관 기관을 통해 발급받고 공증받아 이주공사에 넘기며 서로 IELTS 부랴부랴 시험치고 연방서류를 접수 완료 했습니다.

근데 몇달 지나 landing fee 결제 요청이고 file number가 발급 되더니 신체검사요청 받고 다행히도 영주권이 나와 버렸습니다

2014 7월에 서류를 접수  -> 2015 5 COPR 수령

 

생각보다 빨리...머 그당시 저는 많은 기대가 없었으니 초초할 것도 없었지요. 그렇게 저는 와이프의 전문 Skill 을 통해 영주권에 무임 승차합니다. 사실 저도 한몫했답니다. 배우자의 영어 점수....그게 없었으면 탈락하지 않았을까? 라고 목에 가끔 힘 줍니다. 살기위해


이렇게 운좋게도 상당히 수월하게 단기간에 영주권을 받았던것은 단지 저희가 운이 좋아서 그랬어라고 대외적으로 말하지만, 상당기간 서로 준비를 해왔던것이죠.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신혼집 1년도 안된 새간살이 팔고 영어공부 한다고 그 더운 세부에 가 원래 알고 있던 아토피가 습하고 더위에 약한 저의 특성상 너무 심해져 잠도 못잘 정도였지만 특유의 사교성으로 외국인들과 마주했을때 떨지않고 대면할 수 있다는 자신감...그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ㅋ

한국에 돌아와 다시 일을 해야되는 상황에 주저 없이 무슨 대범함이었는지 외국계 회사만 지원했습니다. 사실 괜찮은 한국회사에서도 오퍼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외국계 회사에 단기계약직으로 일단 머리부터 넣고 그곳에서 제 업무능력을 발휘해 정규직이 되었죠. 왜 계약직을 그것도 단기 계약직을 가려하냐고 주변에 만류도 있었으나 전 향후 제가 다른 나라에서 살아야 하니 당연히 영어를 사용하며 업무하는 환경에 노출되어야 한다고 strongly 다짐한 상태였죠. 외국계기업 특성상 영어도 잘해야 하고 비슷한 환경에서 일해본 경력직만 그것도 내부추천 채용을 통해 대부분 충원됩니다. 저는 정말 운이 기가막히게 좋은 사람이었죠. 말도안되는 일이 일어난거에요. 전혀 외국계 경력도 없도 해외 경험도 없고 영어도 잘하지 못했던 저를 뽑다니....  그곳에서 저는 정말 많은것을 배웠습니다. 처음 외국인에게 이메일도 써보고 회계용어, 업무처리를 영어로 익히고 배웠죠. 이게 학원에서 배울수 있는게 아니니 마치 도제식으로 주변 동료에게 물어물어, 또는 구글링 하며 살아 남았습니다. 물론 퇴근후 영어학원에 가서 공부도 했죠. 그때 고생하며 습득한 지식이 지금 캐나다 현지 백인 회사에서 회계업무를 하는데 매우 결정적인 저의 무기가 됩니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저는 멀리있는 점을 향해 계속 제 자신에게 투자하면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가까워지고 있던것이죠. 희생도 있었고 성취도 있었지만 모든 것이 연결됩니다. 하나의 story 로.


그곳에서 일하며 보니 직원 중 높은 직급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해외의 학위가 있는 분이 많더라고요. 미국 등 외국에서 MBA 도 나오시고 다들 정말 스팩이 어마 어마 했습니다. 저는 정말 지렁이었어요. 그분들을 보며 더욱 해외에 나가고 싶다라는 열망이 더 뜨겁고 뚜렷하게 타올랐습니다. 멋져보이기도 했고 만약 내가 지금 경력에 영어를 좀더 잘하며 해외 경력 ,더 나아가 학위까지 추가 되면  제법 경쟁력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도 많이 했죠. 

저희는 지금도 아이가 없지만, 이민을 준비하시는 많은 분들이 본인 이민 목적을 자녀의 행복을 위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당연히 자식이 없는 제가 어떻게 이해하겠느냐만, 이민은 해외에 돈 쓰며 놀러가 쉬다오는 여정이 아닙니다. 본인이 한국에서 누렸던 모든 직위나 풍요로움을 뒤로한채 가기때문에 많은 것을 감수하고 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자녀에 국한되어 스스로 주문을 외워 버리면, 혹시나 나중에 이민 실패를 하게된다면 그때도 자녀에게서 이유를 찾을까요? 아니죠. 

100% 나자신의 행복을 위해야합니다. 잘돼도 내탓 못돼도 내탓이죠. 그래야 자녀도 행복합니다.

아이가 부모님한테 이민가자고 한거 아니죠? 이글을 읽고 혹시 감정이 조금이나마 상하실 분들은 꼭 한번 그 이민에 대한 목적과 명분을 다시 생각해 보시길 당부합니다.


다시 이글의 주제인 어떻게 오게 되었어요? 를 말하자면

보통 어떻게라고 말하지만 왜 오셨어요를 둘러 묻는 거죠.

그럼 저는 아래와 같이 대답하곤 합니다.


"이곳에 이민오게 된 이유는 찾아보면 수백가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발전을 위해 그리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세계시민이 되기 위해 왔습니다"




첫번째 주제 어떻게 오게 되었어요. 

끝 

    




영주권을 위해 2016년 2월 랜딩 후 Yellow Knife에서 오로라 여행

 (Northern light)